"이한열 열사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업적 친구 박종철"

시사,연예|2020. 5. 17. 11:19

이한열 열사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업적, 이한열 친구, 이한열 박종철

 

 

이한열 열사 프로필

 


출생 생년월일1966년 8월 29일


이한열 열사 고향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사망 1987년 7월 5일 (향년 20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에서 사망 


이한열 사인 6월 항쟁 중 후두부 최루탄 피격에 의한 사망 


본관 전주 이씨


이한열 학력

광주동산초등학교 (졸업)
광주동성중학교 (졸업)
광주진흥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명예졸업) 


직업 학생운동가 


가족 집안 이한열 부모님

아버지 이병섭, 어머니 배은심 


형제자매

이한열 누나3명

남동생 이훈열
 2남 3녀 중 넷째


종교 개신교

 

박종철 열사의 기념비가 모교인 혜광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에 있는 것처럼 이한열 열사의 기념비는 모교 광주진흥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에 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합니다. 동서가 다르지 않고 한국의 경우는 특히 그랬죠. 어렵게 싹이 튼 민주주의가 독재자들의 사나운 칼날에 잘리고 국민은 그때 마다 피를 흘려 지키고자 했습니다. 4ㆍ19혁명이 그랬고 반유신, 반5공투쟁이 그랬습니다.

 

(1987년에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숨진 연세대 학생 고 이한열열사의 장례식 사진입니다. 1987년 이한열 열사의 영정사진을 들고있는 가운데 학생이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우상호 의원입니다.좌측에 배우 우현과 함께, 사진엔 없지만 세브란스병원을 지키던 인원 중 87학번 배우 신현준도 있었습니다.)

 

 

"이한열 열사 생애 요약이야기"

 

1966년 8월 29일,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서 아버지 이병섭과 어머니 배은심의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이한열 열사는 누나 3명이 태어난 다음 태어난 장남이라서 누구보다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습니다.

 

 

(이한열 열사 친구들 사진, 맨 왼쪽이 이한열 열사)

 

어린 시절 대부분을 전남 화순군에서 보냈으며, 광주 동산초등학교, 광주동성중학교, 1985년에 광주진흥고등학교(11기)를 졸업합니다. 광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만큼 중학생 때 5.18 광주민주화운동도 몸소 겪었는데, 그 당시 모범생이었던 이한열은 부모님의 말씀대로 집에 가만히 있었다고 합니다.

 

(살아생전 이한열 열사와, 엄마 배은심 여사 과거사진)

 

이당시, 어머니는 광주시내에서 수많은 시체들을 목격한 후 이한열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하에 집에 있도록 하였다고 하네요. 이한열은 나중에서야 광주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알게 된 후 충격을 받게 되고 1987년 6월항쟁에 적극 가담하게 됩니다.

 

 

 

"이한열 열사 5.18광주 민주화 운동 업적의 시작"

 

1987년 6월 9일, 이한열은 '6.10 대회 출정을 위한 범연세인 총궐기 대회'에서 시위대의 일원으로 참여합니다. 정확하게는 당시 학생 운동 용어로 '소크(soc)'라고 부르는 전위대 역할이었습니다.

 

 

이한열 열사가 참여한 소크는 학생과 전의경 사이에서 대치하면서 학우들을 보호하고 시간을 버는, 훗날 사수대 등으로 불리는 조직입니다.

 

 

(강동원이 이한열 역을 맡으면서 직접 이한열 어머니 배은심 여사를 찾아간 것도 화제였죠)

 

6월9일 오후 4시 40분경, 학과는 달랐지만 마찬가지로 소크였던 도서관학과 학생 이종창은 최루탄을 공격적으로 쏴대는 전투경찰들을 피해 교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같은 시각, 이종창처럼 쫓기고 있었던 이한열 역시 교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는데, 일부 전경이 최루탄을 수평으로 직사하였고 이것이 이한열의 뒷머리에 맞아 그의 얼굴에서 피가 번졌고, 코에서도 피가 쏟아졌습니다.

 

 

 

참고로 이 최루탄은 수류탄처럼 던지는 형태가 아니라 척탄통과 비슷한 발사형입니다. 원래 30도 이상 위로 들어서 발사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안전장치가 있어 그러지 않으면 발사를 하지 못하는데요. 궁금한 이야기 Y 2017년 6월 9일 방송분에 의하면, 당시 경찰이 일부러 노리고 쏘았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렇게최루탄을 맞은 이한열을 발견한 이종창이 그를 끌어안고 학교로 들어가는 동안 그는 계속해서 "뒤통수가 아파. 나 괜찮아?"라고 중얼거렸고, 뛰어 온 학생들이 그를 급히 신촌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으나, 그날 오후 5시 30분에 이한열은 "내일 시청에 나가야 하는데..."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혼수 상태에 빠집니다. 이때 이한열의 왼쪽 뇌 전체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의식이 있을 땐 자기를 들어 옮기는 학생들에게 '쉬었다 가자'고 하기도 했다 하는데요. 이한열의 선후배들은 이런  이한열에 대해 배려심 있는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한열은 6월 항쟁이 끝나고 6.29 선언이 이루어짐으로써 그의 바람이었던 민주화를 보지도 못한 채 결국 25일 만인 7월 5일 오전 2시 5분에 20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됩니다.

 

 

(이종창은 이한열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었으나, 우연히 시위 현장에서 이한열을 부축하게 되면서 역사에 남을 사진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다.)

 

"이한열 열사 사망원인"

 

이한열의 사망 직후 세브란스병원측은 직접사인이 심폐기능 정지, 중간 선행사인은 폐렴, 최초 선행사인은 뇌손상이며, 뇌손상은 첫째 두개강 내 출혈, 둘째 뇌좌상, 셋째 두개강 내 이물질 함유라고 밝혔습니다.

 

 

이한열이 숨진 7월 5일 세브란스병원 부검실에서 서울의대 이정빈 교수(법의학),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황적준 박사 등의 집도로 사체부검이 실시되었는데요. 첫 번째 이한열 부검에서 뇌 속에 든 이물질이 적출되지 않자 집도의들은 이군의 뇌실물질을 방사선과 X선실로 옮겨 X레이 촬영을 통해 뇌간에 박혀 있는 2~3mm 크기의 금속성 파편 2개를 찾아내게 됩니다.

 

 

 

최루탄 뇌관 구리물질이 이한열 뇌 속에 박혀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경찰이 직격 최루탄을 쏘아 이군을 죽인 것으로 입증된 것이죠.

 

 

전두환 정권의 폭압이 극심해지면서 이렇게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국민의 저항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그 선두에는 언제나 학생들이었습니다. 연세대생 이한열은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학생운동의 선두에 섰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졌던 그리고 민주주의 수호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화 1987 이한열 열사 피격 영상)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일 하루는 적어도 우리가 어떻게 민주화가 됐는지 생각해보고 잠시라도 이한열 열사에 대한 애도와 감사를 표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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